제임스 본드를 대놓고 놀린 영화가 있다길래 궁금해서 봤어요. 1994년 작 007 북경특급(國産凌凌漆 / From Beijing with Love)인데, 주성치가 감독 크레딧에 처음 이름을 올린 작품이라고 하더라고요. 007 패러디라고 해서 가볍게 봤다가, 생각보다 짜임새가 있어서 의외였어요.
🎬 007 북경특급 (國産凌凌漆 / From Beijing with Love)
개봉 · 1994년 (홍콩)
감독 · 주성치, 이력지
주연 · 주성치, 원영의
장르 · 코미디, 액션, 첩보 / 비고 · 주성치 첫 감독 크레딧 작품
10년 묵은 백수 첩보원의 재출동
이야기의 시작은 중국의 귀한 공룡 화석에서 두개골 부분이 도난당하는 사건이에요. 국가급 사건이 터지니까 첩보원이 필요한데, 하필 소환되는 인물이 링링칠(주성치)이에요.
이 사람이 문제인 게, 첩보원 부적격 판정을 받고 10년간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나 팔던 백수거든요. 그런 사람이 갑자기 007 흉내를 내며 사건에 뛰어드니까, 폼은 잡는데 하는 짓마다 어긋나요. 그 낙차가 이 영화 웃음의 기본 축이에요.
007을 뜯어 고친 병맛 소품들
이 영화의 진짜 재미는 007 시리즈의 상징들을 하나하나 비트는 데 있어요. 본드가 쓰는 멋진 첩보 도구들 대신, 링링칠은 태양광으로만 켜지는 손전등이라든지, 제멋대로 날아가는 총 같은 어이없는 물건들을 들고 나와요.
특히 링링칠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등장하는 황당한 상황들이 압권이에요. 007 특유의 진지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알고 보면 훨씬 더 웃겨요. 원작을 조롱하는 게 아니라, 애정을 담아 뒤집는 느낌이라 밉지가 않더라고요.
패러디인데 은근히 잘 만든 영화
보면서 놀란 건 이게 그냥 웃기고 마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었어요. 원영의가 연기한 여성 캐릭터와의 관계, 배신과 반전이 얽히는 후반부가 의외로 첩보물답게 굴러가거든요. 웃다가도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균형이 잘 잡혀 있어요.
주성치가 감독으로 처음 참여한 작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자기 스타일을 이때 이미 확실히 잡았구나 싶었어요. 개그의 밀도도 높고, 패러디 대상을 다루는 감각도 노련하더라고요.
한눈에 보기
007 북경특급은 제임스 본드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뒤집은 주성치식 첩보 코미디예요. 10년 묵은 백수 첩보원이 공룡 화석 도난 사건에 뛰어들면서 벌어지는 소동이고, 007의 상징들을 병맛 소품으로 바꾼 개그가 핵심이에요. 그런데 이야기 자체도 은근히 탄탄해요.
007 시리즈를 알고 보면 재미가 배로 늘어나요. 주성치 특유의 유머가 어떻게 감독으로서 정리되기 시작했는지 보고 싶은 사람한테도 좋은 출발점이에요. 저는 이 영화 보고 나서 원조 007 시리즈의 그 장면들이 자꾸 떠올라서 혼자 웃었어요.